
본래 다가올 종말을 파는 비관주의자들은 종교적인 혜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 재난의 위협이 공포의 물결을 가져오는 대신 대담한 트위터 반응으로 홍수를 이룬다. “나는 “세상의 종말”이라는 표지판을 나르곤 했었는데, 이제는 야간조 일에 싫증난다.”고 한 코미디언은 표현한다.
하지만 종교적 최후의 날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하고 있을지라도, 종말론적 세계관은 우리의 취약함을 알릴 새로운 방법, 즉 과학적 진지함으로 다가가는 가장 주목할 만한 접근법을 찾아내었다. 우리는 상호 확증 파괴의 위협을 견디며 살아왔고, 이제는 세계은행이 2100년으로 예측한 “기후 변화로 인한 종말” 이라는 문제와 싸우고 있다.
최근에는 우려에 휩싸인 의료 전문가들이 아마겟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의회에 출석한 영국 최고 의료 책임자는 약제 저항성 감염의 증가를 “종말론적 시나리오… 내가 20년 후에 고관절 치환 수술이 필요하다면 흔한 감염으로 인해 죽게 될 것인데 우리게는 이미 항생제가 떨어지고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묘사했다.
이번 주에 데임 샐리 데이비스(Dame Sally Davies)는 그녀의 연례 보고 제2권에서 이를 더욱 강조하였다:
“우리는 광범위한 항생제 내성의 종말론적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새로운 항생제 개발을 위해 공공 투자와 민간 투자가 긴급히 필요함을 언급하였다. 덧붙여 “일반 대중, 관리자, 전문가의 적합한 항생제 사용” 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 항생제 과용은 “항생제 내성의 힘을 더 기르게 하는 기회를 증가시킨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마가렛 챈(Margaret Chan) 박사가 이 문제를 요약했듯이,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현대 의학의 결말”이 모두 비관적이고 암울하다는 것인가? 만일 의학 분야에 -종교에서도 그러하듯이- 종말론을 보는 시각에 한 가지 이상의 방도가 있다면,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마야 달력(Mayan calendar)으로 떠돌던 그러한 종말론적 두려움은 끝난것인가? 그러한 생각은 그것을 단지 새로운 주기의 시작으로 보았던 마야인들과 공유되던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성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할리우드식의 불꽃놀이로 우리의 지구를 잿더미로 만들것이라고 예측하는 것 외의 다른 방법들이 있다. 내게 공감이 되는 묵시록의 이해는 날마다 우리를 개인적인 그리고 전체적인 암울한 시나리오로 괴롭히는 물질주의로부터 인류가 벗어나 나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영적인 벗어남은 개인마다 진행되고 있고, 재앙이 아닌 오히려 건설적인 것이다.
그러한 점진적인 성장은 치유를 포함할 수 있으며, 그것의 유익함이 있다. 이는 항생제도 듣지 않고 오히려 불편한 부작용만 나타났던 재발하는 축농증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마음 깊이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느낌이 내 안에 깊게 뿌리 박힌 두려움을 이겨내어 그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다. 나는 다시는 그 증상으로 고생하지 않았다.
심신 의료에의 그러한 영적인 접근 방식은 모든 이의 건강 문제를 바로잡아 줄 선택이 될 수는 없겠으나, 영국에서 보충제와 대체 약품에 연간 약 16억 파운드가 사용된다는 측정이 입증하는대로, 약물에 근거한 해결책 그 이상을 보는데 있어서의 폭넓은 관심을 예시해 주는 것이다.
데임 샐리가 “우리가 바로잡지 않는다면 보건 시스템이 19세기 초반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라고 경고한 것을 고려해 볼 때,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선택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욱 놀라운 발상은, 개개인의 폭 넓은 선택권을 억누르기보다 오히려 장려한다면, 항생제의 사용을 줄이려는 의학계의 목표를 이루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변화가 국민 의료보험 정신건강 관리 영역에서 이루어졌는데, 경증에서 중간 정도의 우울증 환자들에게 약을 주는 대신, 대화 요법과 자기 계발서를 처방하여 주었다.
내가 도움이 된다고 알게 된 한 가지는, “종말”(apocalypse)이라는 단어가 본래 부정적인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덮개를 벗기다 또는 드러내다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항생제의 종말“에 직면하여, 건강 관리의 중심에서 진행되고 있는
“드러냄”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환자의 필요가 순전히 생리적이기만 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인식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많은 연구는 정신과 질병 간의 관계를, 특히 스트레스와 신체의 다양한 감염과 싸우는 능력 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항생제의 연구를 더 하려고 한다면 심신 의학의 이해를 넓히고 깊게 하는 연구는 어떠한가?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생
각 그 자체가 -특히 두려움이 또한 감염의 매개체가 될 수도 있는가? 그리고 면역력을 강화하는 힌트를,“두려움을 극복하는 자는 진실로 자유로울 것이다” 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증명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400년 후 갈릴리 목수의 한 추방당한 추종자는 한 가지 “방법”을 더 했는데, 기록하기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느니라” 라고 했다. 13세기 후에 스페인 랍비이자 의사겸 철학자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말하기를: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라고 했다.
200년 전의 두려운 건강 관리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난 날의 심신 의학의 지혜는 미래의 종말론적 시나리오에 우리의 면역력을 보강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토니 로블은 크리스천 사이언스 프랙티셔너이자 블로거이다.
본 기사는 Huffington Post(허핑턴 포스트)지에 게재되었다.